2022. 6. 13. 16:58ㆍ지식
얼마 전 MBC는 삼성가 마당에서 쏟아져 나온 유골과 무덤 61기를 심층 취재한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삼성문화재단 이서연 이사장이 소유한 이태원 저택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무덤이 발견됐다는 겁니다. 이름도 연고도 알 수 없는 총 61기의 무덤에서는 형태를 잃어버린 검은 진흙 수준의 유골 수십구가 발견됐다고 하죠. 그런데 이 유골이 발견되자마자 삼성과는 전혀 관련 없을 것 같던 유관순 열사가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됐는데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되신 순국선열과 전몰한 장병들의 충렬을 기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은 매년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는 안타깝게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과 국군 장병들의 얼을 위로하고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거행되죠. 그런데 얼마 전 현충일에는 다소 섬뜩한 뉴스 보도가 나왔습니다. 바로 한국 최고 재벌가 삼성이 소유한 이태원의 한 저택에서 유골이 발견됐다는 보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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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유골이 발견된 것은 이미 2년 전의 일이지만 현충일을 맞아 심층 취재한 내용을 보도했는데요. 사건은 2020년으로 거슬러 갑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그해 4월 동생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에게 서울 용산구 이태원 언덕길에 있는 단독 주택 부지를 매매합니다. 주택 부지 포함 5개 필지 약 500평을 평당 5천만 원에 총 247억 3,580만 원을 주고 자신이 신혼집으로 사용했던 주택을 처분했는데요. 이서현 이사장은 이를 전액 현찰로 매입한 후 신축 공사를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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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축 공사 신고를 마친 후 터파기 공사를 시작하자마자 무덤이 발견됐는데요. 만약 공사 중 무덤이 발견되는 경우 공사는 의무적으로 중단하고 문화재청의 조치를 따라야 합니다. 이에 공사를 중단한 후 민간 법인이 발굴 조사를 시작했는데, 처음 1개인 줄 알았던 무덤이 무려 61기가 쏟아져 나왔죠. 대부분의 무덤은 관도 갖추지 못한 상태, 대부분 유골의 형태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무덤에 한 명이 묻힌 것인지 여러 명이 묻힌 것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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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유골이 소위 '삼성타운'이라고 불리는 이태원에서 발견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유한 1924년 일제강점기 지도를 보면 이태원과 보광동, 한남동 경계는 전북 공동묘지로 표시됩니다. 현재는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는 과거 국방부 청사에는 일본군 24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이 용산 지역에 일본인들이 대규모 택지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타지역에 비해 용산에 일본인들 주택이 많았던 이유는 공동묘지가 많아 택지 확보가 상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인데요.
이태원 일대에 유독 공동묘지가 많았던 것은 조선 중기 때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묻힐 곳이 없어 사대문 밖인 이태원을 공동묘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택지 개발 과정에서 일본은 이태원 일대에서 대규모 유골 이전 사업을 펼쳤는데, 군사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100만 개가 넘는 유골을 강제로 파내 전부 미아리에 집단 매장해 버렸죠.
하지만 모든 유골이 전부 이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광복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사 도중 유골이 발견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하는데요. 삼성가 이서현 이사장의 집 앞에서 유골이 발견된 것도 당시 유골 이전 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공동묘지 유골이 100년도 지나 발견된 겁니다.
그런데 이태원 일대에서 유골을 파내 강제로 이전시키다 유실된 유골 중 유관순 열사의 유골도 있었습니다. 일본에 저항하다 안타까운 삶을 희생당한 18세 소녀의 유골이 일본군 손에 이전되다 흔적도 찾지 못하게 된 겁니다. 지금도 그 유골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 그녀는 무덤이 없죠.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 열사의 사진은 고문과 구타로 퉁퉁 부은 상태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그녀가 18살이 맞나 싶을 만큼 퉁퉁 부은 얼굴은 그녀가 형무소에서 얼마나 많은 고문을 당했는지 말해줍니다.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된 외국인조차도 '심장이 둘로 쪼개지는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죠. 이에 한 네티즌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며 복원을 시도해 그 결과를 공유했습니다. 지난 2020년 9월 29일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한 네티즌이 '유관순 열사 사진을 조금 더 복원해 봅니다'라며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녀의 사진을 볼 때마다 고문으로 부은 얼굴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라면서 17세면 제 아이보다 겨우 4살 연상인데 이렇게 고생한 얼굴밖에 없어 페이스북으로 약간 수정해 생전 모습을 그려봤다"라고 했습니다.
퉁퉁 부은 사진 아래 복원된 그녀의 얼굴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꽃처럼 예쁜 18세 소녀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제가 수능 공부가 싫어 PC방으로, 오락실로 도망 다닐 때 18살 그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다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잠시 언급했듯이 유관순 열사는 독립을 위해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지만 무덤이 없습니다. 그녀의 고향 충남 천안시는 1989년 10월 12일 그녀의 고향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쓰기는 했지만 초혼묘란 망자의 사체가 발견되지 않거나 매장 장소를 알 수 없을 때 혼을 불러 묘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유골이 묻힌 묘가 아니라 '유관순 길'과 '유관순 열사 추모비'만 남았습니다. 그녀의 유골이 유실된 이태원에 말이죠.
그녀를 좀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의 병천에서 태어난 그녀는 공주 영명학당에 입학했지만 1916년 미국인 여성 선교사 사애리시(Alice H. Sharp)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3년 31살의 나이로 조선에 선교사로 건너와 충청 지역 선교를 책임졌는데, 1910년경 8살의 유관순 열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신앙심이 두텁고 리더십이 뛰어난 유관순 열사를 유독 예뻐해 수양딸로 삼은 뒤 1916년 자신이 교사로 일했던 서울 이화학당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사애리시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며 유관순 열사는 잔 다르크 전기를 접했는데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죠. 어쨌든 이화학당으로 편입한 후 고등과 1학년이 되던 1919년에 3·1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학당은 학생들의 안전을 우려해 만세 운동 참가를 말렸지만 혈기왕성한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넘어 만세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 조선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졌고 결국 유관순 열사는 고향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됐는데요. 이것이 바로 그녀의 마지막이 된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입니다.
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의 일입니다. 이날 아우내 장터에서 그녀는 장터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었는데, 일본 앞잡이였던 조선인 정춘영이 그녀를 체포하면서 강제로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선 1919년 3·1 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후 그녀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섰습니다. 2007년 향토사학자 임명순 씨가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 1심 재판 기록을 찾아냈는데, '피고 유관순 징역 5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심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은 후 2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됐습니다.
당시 일본은 지방법원(1심)-복심법원(2심)-고등법원(3심) 제도를 운영했지만 그녀는 3년 형을 확정받은 후 상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음 해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형기가 1년 6개월로 단축됐지만 출소 3개월을 앞두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생을 마감했는데요. 형무소에 수감된 후 1년 뒤 1920년 3월 1일 유 열사는 감옥에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녀의 만세에 고취된 3천여 명의 수감자들도 이에 호응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고, 이 함성을 들은 시민들도 서대문형무소 주위로 몰려와 동참했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던지 전차의 통행을 마비시킬 정도였고, 결국 경찰기마대가 출동한 뒤에야 잦아들었는데요. 이때 유관순 열사는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혀 일본 헌병들은 무자비한 구둣발로 그녀를 짓밟았고,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불과 몇 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만약 그녀의 친인척이 그녀의 시신을 수습했다면 무덤이 있을 것인데 그녀의 무덤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체포되던 날 부모님 모두 일본 헌병에게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 그녀는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는데요.
그런데 여기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캡처본으로 남겨드리는 사망 원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그녀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통을 받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녀가 구타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위 사진에 언급된 내용들은 왜곡되고 과장된 내용입니다.
아마 조회수를 위해 근거 없이 선정적이고 과장된 사실을 전하는 듯한데, 그렇게 왜곡하지 않아도 그녀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우선 20여 년 간 유관순 연구소 소장을 지낸 박충순 전 백석대 교수는 "여러 혹독한 짓을 했으니 뭔들 못했을까 싶지만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그녀가 자궁 파열로 사망했거나 훼손당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2013년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으로부터 이관받아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는 '옥중 타살' 즉, 감옥에서 구타당해 숨진 것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2004년 발간된 '유관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이라는 책에서 그녀와 함께 투옥 생활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은 "유관순이는 너무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서 죽었어요"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시신이 훼손되었다는 내용도 왜곡입니다.
그녀가 옥중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 이화학당 교장 '제닛 월터(Jeannette Walter)'는 형무소에 그녀의 시신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전 세계가 알게 하겠다"라며 일제를 압박했고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을 조건으로 시신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없는 그녀를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용히 묻어 주었죠. 이후 그녀는 인터뷰에서 "나는 그녀의 온전한 몸에다 수의를 입혔다"라고 밝혔는데, 굳이 그녀가 자기 제자였던 망자에 대해 거짓을 남길 필요는 없을 겁니다.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는 왜곡하고 과장하지 않아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숭고함이 옅어지지 않습니다. 과장해서 알려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런 왜곡과 과장, 근거 없는 소문들이 거짓이라고 밝혀지는 순간 오히려 숭고한 희생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조회수의 유혹에 빠져 선동하지도 말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정확한 사실을 가려낼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 보호를 받는 본 콘텐츠는 유튜브 채널 디씨멘터리의 이용허락을 받아 유텍스트 YouText가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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