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9. 20:00ㆍ지식
정선공주(1404년~1424년)는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의 딸로 1404년(태종 4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4남 4녀 가운데 4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출생 사실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수많은 후궁을 들였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원경왕후와 갈등이 극에 달해 있을 때 그녀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선공주가 태어나고 몇 년 후 외척 세력을 극도로 경계하던 태종이 부인 원경왕후의 친정에 대한 숙청을 시작하면서 왕과 왕비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결국 태종 10년(1410년) 3월, 제주도에 유배를 가 있었던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인 민무구·민무질에게 태종은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고 태종 16년(1416년) 1월, 왕비의 남은 남동생들인 민무휼·민무회 또한 죽게 하면서 원경왕후의 집안은 멸문지화와 다름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태종은 일방적으로 막내딸 정선공주의 혼례를 추진하게 되지만 원경왕후는 큰 슬픔에 막내딸의 혼사에 아무런 힘도, 의지도 보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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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정치적인 상황들은 막내딸인 정선공주의 남편감을 맞이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외척들을 여전히 경계한 태종은 자신의 딸들을 쟁쟁한 유력 가문에 시집을 보낸 것을 후회하며 슬슬 뒷일을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태종과 원경왕후의 4명의 딸 중 이미 시집을 간 공주는 3명으로 첫째 정순공주가 이거이의 아들 이백강, 둘째 경정공주는 조준의 아들 조대림, 셋째 경안공주는 권근의 아들 권규와 혼인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왕실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들과 사돈을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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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태종은 막내딸 정선공주만큼은 권력과 관련이 없는 곳으로 시집을 보내기 위해 남편을 간택하기로 결정하면서 조선 최초의 부마 간택이 실행됩니다. 태종은 의도적으로 4, 5품 이하 사대부 가문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부마를 결정하려고 하였고 이런 과정을 거쳐 공주의 배우자로 최종적으로 간택된 주인공은 남휘였습니다. 남휘는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손자였으나 남재는 연로해서 정치적 야심이 없었고 아버지인 남경문은 봉정대부 병조의랑을 지냈지만 26세로 요절했기에 명문가 집안 출신이나 미래에 외척으로서 영향력이 크게 없을 태종의 입맛에 딱 맞는 혼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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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하나가 있는데 나이는 아직 어리나, 국가에 일이 없는 때에 마땅한 사람에게 보내고자 하여, 대언(승지) 등에게 명하여 4, 5품 이하 사대부의 집 아들을 널리 구하여 부마를 삼으려고 하였는데, 어제 여러 대언이 세 사람을 아뢰었다. 그중에서 의정 남재의 손자가 명격(사주팔자, 궁합)에 대강 합하기 때문에 이제 이미 정하였다. 부마가 되는 자는 가난하고 천함을 걱정할 것이 없다. 문벌의 자손은 교만하고 부귀한 데에 습관이 되어 패망하지 않는 것이 적다. 그러므로 내가 특별히 관직이 낮은 이들 가운데 과부의 아들과 같은 자를 취하여 이를 삼으려는 것이다.
이 아이가 비록 의정 남재의 손자이기는 하나, 의정이 이미 늙었고 그 아비가 일찍 죽어서 과부 어머니에게서 자라났으니 단연코 교만하고 방종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여러 사위를 보니, 처음에 사위를 삼을 때에 평양백 조준은 개국 원훈이고 나라와 편안함과 근심을 같이하기 때문에 사적에 실린 것과 황제의 조정의 일을 널리 보아서 그 아들 조대림(둘째 경정공주의 부마)으로 부마를 삼았는데, 무자년 겨울에 과연 목적(목인해)에게 속아 하마터면 제 명에 죽지 못할 뻔하였다.
만일 내가 천륜지정에 측연하여 마음을 다하여 살피지 않았더라면 그 후회되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여러 경들이 함께 목격한 일이다. 청평군 이백강(첫째 정순공주의 부마)의 아비 이거이도 또한 대죄를 지었는데 아들 때문에 명대로 편안하게 죽을 수 있었다. 아비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아들이 부마이면 일의 난처하기가 더 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벼슬이 낮은 집에서 구하면 거의 교만한 버릇이 없을 것이다." [태종 15년(1415년) 11월 6일]
태종의 입맛에 맞는 부마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조건에 맞는 여러 명의 후보자 중 남휘가 간택이 된 것은 할아버지가 남재라는 영향이 컸습니다. 남재(1351년 ~ 1419년)는 이색의 제자로 고려시대에 진사에 급제하여 좌부대언까지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과 두루 친하게 지냈지만 이후에는 동생 남은과 함께 이성계를 적극 지지하며 조선 개국에 힘씁니다.
"고려가 조선으로 세상이 바뀔 무렵에 태조를 추대하는 모략이 재한테서 많이 나왔고......" [세종 1년(1419년) 12월 14일] 결국 1392년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지만 남재는 상을 받기를 원치 않아 이를 피해 지방에 있었습니다. 태조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사방을 수소문하여 남재를 찾게 하였고 그가 별 탈 없이 건강하자 이를 기뻐하며 '재'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이후 남재는 개국 1등 공신으로 중추원 학사에 대사헌을 겸하면서 의성군에 봉해집니다.
1394년(태조 3년)에는 정안군(후일 태종) 이방원을 주축으로 명나라로 향하는 사신단이 꾸려졌는데 이때 남재가 따라가기를 자청하여 이방원을 도와주게 됩니다. "갑술년 사이에 태종이 왕자(당시 정안군)로서 명나라에 들어갔을 때 재가 따라갔는데, 그때 함께 갔던 재상이 자못 불공하였으나 홀로 재만은 예로서 공경하였다." [세종 1년(1419년) 12월 14일]
1396년(태조 5년)에 남재는 도병마사에 임명되어 대마도를 정벌하는데 참여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얼마 후 당시 핵심 세력이었던 정도전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정도전 일파와 그와 친분이 있는 동생 남은과도 거리를 두게 됩니다. 이로 인해 남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무인년에 그의 아우 남은이 정도전·심효생과 더불어 여러 적자(신의왕후 아들들)를 없애버리기로 모의하였으나, 이방원이 재는 모의에 간여하지 않았다 하여 사저에 두었다가, 사건(1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뒤에 죽음을 면하게 하여 귀양보내고 다시 소환하였다." [세종 1년(1419년) 12월 14일]
1401년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남재는 조준과 함께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는 경제에 밝고 산술을 잘하여 '남산'이라 불렸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정점인 영의정에 오르게 됩니다. 1415년(태종 15년) 11월 남경문의 아들이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남재의 손자 남휘가 정선공주의 부마로 결정되었고, 이듬해인 1416년(태종 16년) 2월 두 사람이 혼인을 하면서 부마 남휘는 숭정대부 의산군에 봉해집니다.
이렇게 해서 당시 13세였던 정선공주의 혼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정선공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공주는 성품이 정숙하고 곧으며, 행실은 공손하고 착하였다. 중곤(왕후)에 있을 때로부터 극진한 효성이 숙성하였고, 집을 가지기에 이르러서 근검함이 더욱 나타났다. 바로 규문의 화목함을 이루었고, 이로써 척리(임금의 내척과 외척)의 규범을 보여 주었다."
[세종 6년 2월 2일] 정선공주는 혼례를 올린 후 다른 공주들이 하가했던 것처럼 유모와 몇 명의 궁녀들과 함께 자신을 위해 지어진 집으로 옮겨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가 살았던 집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상왕(태종)과 대비(원경왕후)가 남휘의 집에 이어하다." [세종 1년(1419년) 12월 20일] "중궁(소헌왕후)과 세자(양녕대군)가 남휘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다." [세종 4년 5월 9일]
이렇게 두 가지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정선공주가 살았던 집은 상왕인 태종과 중전인 소헌왕후가 머물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남휘의 집에 이어한 상왕 태종을 뵙기 위해 세종이 수시로 문안인사를 하러 온 것을 보면 창덕궁과 멀지 않았던 곳에 공주의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선공주와 남휘의 부부생활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법상 15세가 지나야 첫날밤을 치를 수 있었기에 공주는 16세 나이에 첫째 아들을 출산하며 여느 부부와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정선공주가 17세 때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2년 후에는 아버지인 태종까지 죽게 되자 연이은 초상으로 인해 정선공주는 몇 년간 남편과의 부부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당시 왕실에서는 유교식 장례법을 따랐기에 상을 당하면 금욕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주의 남편인 남휘는 금지된 부부생활의 불만으로 노름에 빠졌고 부모를 잇달아 잃은 슬픔으로 인해 몸져누운 정선공주를 외면하며 점점 더 노름에 빠져 투전판을 기웃거렸습니다. "임인년(1422년)에 공주가 병이 나서, 내가 근심하고 걱정되어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는데도, 너는 병증세가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고 내시를 데리고 쌍륙(雙六)만 치고 있어, 조금도 가장된 도리가 없었고......" [세종 6년(1424년) 7월 18일]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남휘의 행태에 분노한 세종은 아마도 그를 불러 꾸짖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휘는 관비 윤이를 보란 듯이 첩으로 들이게 됩니다. 남휘가 첩으로 맞이한 관비 윤이는 군인들을 상대하던 좌군비 출신으로 남휘를 만나기 전 윤자당의 첩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공신으로 상당한 힘을 가졌던 윤자당은 세종 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휘는 초상이 난지 100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윤이를 첩으로 맞이 한 것이었습니다.
공주는 남편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과의 관계 회복에 힘쓰게 됩니다. 이후 정선공주는 세종 5년에 둘째인 딸을 출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의 임신 시기가 태종의 3년 상과 겹치는 것을 보면 공주가 자신의 고집을 꺾고 남휘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부부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연이은 부모님의 상에 약해진 몸으로 병마에 시달리다 출산 후 몸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2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선공주의 졸기 "정선공주가 졸하였다. 임금(세종)의 동복누이동생으로, 의산군 남휘에게 하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 21세로 돌아가니, 임금이 슬퍼하여 찬수를 거두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세종 6년(1424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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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과 세종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던 ‘그녀’ (2부) 너무 빨리 져버린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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