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조선 태종 '이방원'이 사랑한 둘째 딸 경정공주, 그녀의 이야기

YouText 2022. 5. 30. 18:00

조선 태종 '이방원'이 사랑한 둘째 딸 경정공주, 그녀의 이야기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경정공주(1389년~1455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9년(창왕 1년)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1403년(태종 3년)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즉위(1402년)한 뒤 조선에 통혼을 요구해 오자 태종은 이를 피하기 위해 당시 결혼 적령기였던 경정공주의 혼례를 서두르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에 당시 영의정이었던 조준의 아들 조대림이 부마로 결정되면서 공주의 혼인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조대림은 모친상을 당한 지 4달밖에 되지 않아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며 신하들이 반대를 하게 됩니다.

태종은 “지난번에 온 사신 황엄과 지금 돌아온 성석린 등이 모두 말하기를, ‘황제가 우리와 결혼할 뜻이 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정공주의 하가를 이토록 급히 하는 것이다.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태종 3년 9월 16일>

 

50년 동안 매일 2개씩, 3만 개가 넘는 ‘빅맥’을 먹어 기네스북에 오른 남자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돈 고스케는 세계에서 맥도날드의 빅맥을 가장 많이 먹은 남자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돈은 1972년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빅맥을 매일 2

youtext.ai

 

자존심만 센 무례한 상대방을 만났을 때 (1부) 착한아이증후군의 함정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 _ 이하 몸장) 권수영 교수님 _ 이하 호칭 생략) 몸장) 오늘 궁금한 게요. 우리가 살다 보면 나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youtext.ai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은 태종은 처남 민무구를 통해 이 혼인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며 경정공주와 조대림은 곧바로 혼례를 치르게 됩니다. 이렇게 공주의 통혼 문제를 시작으로 명나라 사신들은 영락제에게 여인을 바치기 위해 노골적인 요구를 하게 되고, 결국 태종 8년(1408년) 조선은 명나라로 보내질 공녀를 뽑게 됩니다.

태종실록에는 명나라에 보낼 공녀를 고르는 수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심지어는 뽑힌 공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명나라 사신 황엄이 직접 지방으로 내려가 여인들을 고를 정도였습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인터뷰하다가 최신 스마트폰 얻게 된 사연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2015년,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은 발레 공연을 관람하고 공연장을 나섰는데, 기자가 LG 휴대폰으로 이재용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이재용

youtext.ai

 

한국 독자 개발 전투기 ‘KF-21’ 시험 비행 임박, 고성능 전투기로의 발판!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 구독자분께서 영상에 댓글로 KF-21 보라매는 정말 엄청난 기술력인데, 국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다뤄달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youtext.ai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때 뽑힌 여인들을 '진헌녀'라고 불렀으며 선발되는 과정이 엄격했는데, 신분이 낮으면 안 되었고 양갓집 규수 중에서도 미인이어야 되었으며 심지어 그 집안에 노비가 없으면 안 된다는 기준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집이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태종대에 3차에 걸쳐 뽑힌 여인들은 총 8명으로, 그녀들을 모시기 위한 수행원 자격의 여인들까지 포함하면 총 40여 명의 조선 여인들이 공녀로서 명나라에 건너가게 됩니다.

 

기회는 단 한 번! 목숨을 내건 이들의 한 방, ‘꿀벌’ ‘치타’ ‘엔치테누스’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맛 좋은 정보를 알려드리는 기호식품입니다. 야생에서 적을 만났을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단 한 방

youtext.ai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여담으로 명나라 영락제의 스무 명이 넘는 후궁 중 조선 출신이 8명이었는데 이들이 바로 조선에서 건너간 공녀들이었으며, 이중 권 씨는 황후에 못지않은 대우를 받지만 안타깝게도 요절하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또 다른 조선 후궁인 여 씨가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몇 년이 지나 명나라 후궁이 환관과 사통해 큰 파장이 일어난 '어여의 난'을 수사하면서 조선 출신 후궁 여 씨의 죽음이 무고임이 밝혀지지만, 이 사실에 분노한 영락제가 수많은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약 2,800명) 4명의 조선 출신 후궁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겨우 살아남은 조선 출신 후궁은 두 명으로 한 씨와 최 씨였는데 그녀들 역시 영락제가 죽게 되자 안타깝게도 모조리 목을 매도록 강요를 당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영락제의 무덤에 그녀들을 순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중 한씨가 조선 전기 문신이자 외척인 한확의 누나였으며, 한확은 누나 덕분에 명나라에서 큰 벼슬을 하게 됩니다.

명나라에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조선에서도 승승장구하던 한확은 영락제 사후 누나가 황제의 무덤에 순장이 되면서 힘을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에게 자기 여동생을 후궁으로 보내면서 입지를 다시금 다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딸을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게 하면서 그는 양국에 혼맥을 쌓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렇게 그의 둘째 딸과 여섯 번째 딸이 각각 세종의 서자 계양군과 세조의 맏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데 이때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와 혼례를 올려 세자빈이 된 딸이 바로 성종의 어머니이자 사극으로 인해 대중에 널리 알려진 인수대비 한씨였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태종이 경정공주를 조대림에게 시집을 보낸 이유는 명나라의 통혼 요구로 인해 급작스레 혼인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지만,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 평양백 조준인 이유 또한 컸습니다.

부마 조대림의 아버지인 조준은 태조 6년(1397년) 하륜 등과 함께 조선시대 최초의 공적인 법전인 경제육전을 편찬한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인 평양 조 씨는 증조부 조인규 대에 이르러 고려 충선왕의 장인인 국구가 되면서 권문세가로 이름을 알린 집안이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하지만 조준은 자신의 출신과는 다르게 권문세족들의 폐해를 고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민왕대에 과거급제를 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했지만, 권신들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은둔생활을 하게 됩니다. 초야에 묻혀 생활했지만 늘 개혁을 꿈꿨던 조준은 이성계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다시 조정에 출사하게 됩니다.

이후 대사헌으로서 문하시중 조민수를 탄핵하여 축출시키고 고려 왕들의 즉위와 폐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그리고 1392년, 드디어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개국공신에 오르면서 평양백에 봉해집니다. 하지만 세자 책봉 문제에 있어서 정도전이 막내 왕자인 방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논란이 일어나는데요. 이때 조준은 적장자 또는 공을 세운 아들로 세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핵심 개국공신 중 하나였지만 가장 큰 세력인 정도전 일파와 결을 달리하게 됩니다.

경제와 이재에 밝아 전제 개혁안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개편한 인물로 평가받은 조준은 이후 정도전, 남은 등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자 실무자의 입장에서 극구 반대를 하게 되면서 완전히 정도전 일파와 결별하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그리고 1398년 1차 왕자의 난 직후에 난을 일으킨 이방원의 편을 들면서 정사공신 1등에 책록이 됩니다. 태종 이방원이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즉위한 이후 1401년 판문하부사가 된 조준은 작위 제도가 개편되면서 평양백에서 평양부원군으로 작위가 바뀌게 됩니다. 이는 조선 초기에 공, 후, 백의 호를 사용하였으나 태종 1년, 중국의 제도를 조선의 체제에 맞게 작위 제도를 다시 만들면서 부원대군, 군, 부원군, 단산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1403년 영의정(영의정부사)에 오르게 된 그는 다섯 번째 아들 조대림이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와 혼례를 치러 부마가 되면서 그의 가문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후 조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1405년(태종 5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세자(양녕대군)와 함께 친히 조준의 빈소를 방문하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통곡하고, 소선(육류가 없는 간소한 반찬)을 자시었으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임금과 세자가 친림하여 조제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태종은 어진 정승을 평론할 적에 풍도와 기개를 반드시 조준으로 으뜸을 삼고, 항상 ‘조 정승’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태종 5년 6월 27일>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아버지 조준이 세상을 떠난 뒤 상을 치른 후 조대림은 왕실의 부마로서 태종 7년(1407년) 12월 용양, 용기, 용무사상호군을 겸하면서 군권을 가지게 되었고 22살의 나이가 된 태종 8년(1408년)에는 좌군도총제에 오르며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군 목인해가 '조대림이 역모를 꾀하려고 했다'며 고발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는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목인해는 관노 출신으로 태조의 딸 경순공주의 부마 이제의 가신이었다가 이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태종을 섬겨 호군(장군)에 봉해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경정공주의 부마 조대림 집의 종 출신이었기에, 목인해는 자주 부마의 집을 드나들다가 아직 어리고 실정이 어두운 조대림을 이용해 부귀를 도모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조대림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군사를 일으키게 한 후 역모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연출한 뒤 자신이 고발해 공을 세울 생각이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후 목인해가 만든 판에 휘둘려 조대림은 실제로 군사를 일으키게 되고 사건이 누가 봐도 역모라고 믿을 만한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하지만 조대림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태종은 일의 전모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지만 과감히 모른척하는 선택을 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당시 태종이 그렇게 한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좌군도총제이자 부마 조대림은 당시 군부 핵심 관료 중 왕실의 종친으로 신하들에게만 병권을 맡겨둘 수 없었던 태종이 일부러 임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곧바로 목인해를 잡아들이면 사건 자체는 끝이 나겠지만 목인해와 접촉한 조대림의 혐의 자체는 남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조대림은 역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허술한 행동을 한 건 사실이었고,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친이 군권을 가진 것에 대한 반발 여론이 조성될 게 뻔했습니다.

이에 태종은 조대림에게 역심이 없음을 보다 확실히 하고 신하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묘안이 필요했기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놔두고 상황을 지켜보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결국 조대림이 이끈 병사들은 정말로 역모의 의도가 없었기에 태종이 미리 조치한 대로 움직이게 되었고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목인해의 계획이 실패하면서 조대림과 목인해는 사로잡히게 됩니다.

영문을 몰랐던 조대림은 순금사에 감금되어 심문받게 되었고, 그는 곧바로 20대의 곤장을 맞았지만 자신이 역모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억지로 형벌을 가하지 말라는 왕명을 내렸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조대림은 64대의 장을 추가로 맞는 고초를 겪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얼마 후 목인해를 신문하게 되고 그가 장 10대를 맞고 자신이 조대림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실토하면서 조대림은 무죄가 됩니다. 결국 목인해는 능지처참 형을 선고받았으며 곧바로 저잣거리에서 형벌이 집행되려 했지만 대사헌 맹사성을 비롯한 대간들이 태종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면서 형 집행이 중단됩니다.

"목인해를 능지처참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조대림이 일찍 진상을 아뢰지 아니했으니, 어찌 잘한 것입니까? 사형을 늦추고 다시 조대림과 대질 신문하여 주범과 종범을 분간해 시행하소서"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에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조대림과 목인해의 대질심문을 벌이지만 목인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면서 조대림은 결국 무죄가 확정되어 방면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조대림을 고문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백을 위해 추가로 장을 때리고 목인해의 사형집행을 늦춘 저의를 캔다며 조사에 참여한 맹사성과 박안신 등을 옥에 가두고 국문토록 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목인해와 그 일가족들에 대한 형을 집행시킨 후, 태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조대림은 본래 역모를 꾀한 적이 없는데 맹사성이 목인해와 함께 주범과 종범을 가려야 한다고 말한 저의가 대체 무엇이냐? 모반 대역에서도 주범과 종범을 나누어야 하느냐? 이번 대간의 의논은 조대림을 죽여서 왕실을 약화하려 했다는 진술을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이다. 만일 승복하지 않거든 모질게 때려 신문하되, 그들의 죽음을 아낄 필요가 없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결국 맹사성을 포함한 신하들이 매를 견디지 못해 죄를 인정하였고, 심지어 맹사성의 아들 맹귀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죽기까지 합니다. 1408년(태종 8년) 12월 11일, 대사헌 맹사성, 정언 박안신, 좌정언 이안유, 감찰 맹귀미 등을 극형에 처하고 저자에서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을 집행하라는 태종의 어명이 내려집니다.

수많은 공신들과 대신들이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거듭해 청하지만 태종은 끝까지 그들의 말을 전부 거절하고 시가지에 모여 형을 집행하려고 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렇게 맹사성 등이 극형에 처하기 직전 태종은 "사안이 중하고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나, 나라를 군주 혼자서 다스릴 수는 없기에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차후로 경들도 왕실이 약해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도록 하라."라며, 신하들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태종의 권모술수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조대림의 모반 사건은 끝이 나게 됩니다.

이후 조대림은 태종의 비호 아래 왕실의 부마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그는 1409년에 병서 강토 총제, 평양도절제사 등을 역임했고 1410년에는 윤사수와 함께 명나라에 북벌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습니다. 1411년 태조의 어진을 평양부에 봉안시키고 서북면의 농사 작황을 보고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다가 세종 즉위 이후로는 여러 차례 유후사에 파견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거나 사신으로 명나라로 파견되는 외교적인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조대림은 1422년(세종 4년) 보국숭록 평양부원군, 1426년에는 대광보국에 봉해지지만 안타깝게도 세종 12년(1430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에 세종은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정지했으며 쌀·콩 아울러 70석, 종이 2백 권을 부조로 내리고 강안(康安)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조대림은 아버지 조준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라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지만, 그는 만 15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조대림의 모반 사건에서 84대의 곤장을 맞고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심지가 굳은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주범이었던 목인해가 곤장 10대에 자신의 죄를 자백했고 태종의 꾀에 넘어가 고문을 당한 맹사성을 비롯한 여러 명의 신하들이 없는 죄를 시인한 것을 보면, 조대림은 어려서 어리숙한 면이 있었지만 남다른 면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또한 태종·세종시절, 한창 명나라와 관계가 민감했던 중요한 시기에 조선을 대표해 사신단을 이끌고 명나라에 다녀오거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등 외교 업무를 잘 수행하였고 꾸준히 승진한 뒤 사후 시호까지 받는 등 부마로서 자기 몫을 충분히 한 인물이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한편 경정공주가 혼인한 후 거주하던 자택이 있던 곳을 작은 공주가 사는 곳이라 하여 작은 공주골’이라 불렀으며 이후 ‘작은 공주골’이 한자로 바뀌어 소공동이 되었는데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의 지명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경정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 자녀들의 재산 분쟁으로 인해 국가에 환속되었던 경정공주의 집은 선조 16년(1583년)에 200여 칸의 궁가로 화려하게 다시금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선조가 자신이 사랑하던 셋째 아들 의안군의 살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공주의 집을 크게 손을 본 것이었지만 의안군이 12살의 나이에 역병으로 요절하면서 또다시 비어 있는 집이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이 왜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의안군의 집은 1년 동안 왜군 총대장인 우끼다 히데이에가 거처하는 본영이 되었고 한양이 수복되고 명나라 군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몽진에서 돌아온 이후 궁궐의 임시 정전 역할을 하면서 남별궁라 불리게 된 공주의 집은 점차 명나라,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세월이 흘러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오르면서 남별궁의 터에 황제국을 상징하는 환구단(원구단)을 세우지만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이 헐리면서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1970년대 노후화된 건물을 헐고 다시 지으면서 현재는 웨스턴조선호텔이 공주의 집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경정공주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남동생 양녕대군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공주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녀는 남편 조대림의 역모사건으로 마음고생을 한 것 말고는 왕들의 비호 아래 평탄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남동생이자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여자 문제로 늘 말썽이었는데 심지어 태종 18년(1418년), 몰래 곽선의 첩인 기생 어리를 궁에 들였다가 태종에게 걸려서 어리가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후 어리가 임신하여 세자의 아이를 낳았고 곧바로 유모가 필요하게 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정공주가 유모를 구해 세자궁에 보내주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평양군 궁주(경정공주)가 말하기를, ‘세자전에서 유모를 구하여 부득이하게 이를 보내었습니다.’ 이에 중궁(원경왕후)이 놀라서 ‘이게 어떤 아이냐?’라고 되물었고 궁주는 ‘어리가 낳은 아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까닭을 들으니, 김한로(세자의 장인)의 처가 김한로의 말을 따라서 어리를 종비라 칭탁하고 데리고 들어가 세자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태종 18년, 3월 6일>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경정공주는 부마 조대림과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두었으며 장남이 조무영이었습니다. 장녀는 안진과, 차녀는 김중엄과 각각 혼인하였으며, 3녀는 조찬과 4녀는 김중렴과 각각 혼례를 올리게 됩니다. 이 가운데 차녀와 결혼한 김중엄은 문종의 첫 부인이자 폐비된 휘빈 김 씨의 오빠이자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 씨의 조카로 왕실과 밀접한 인물이었습니다.

참고로 공주의 후손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왕실에 관련된 인물들이 나오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의 외조모(정부인 김 씨)가 경정공주의 외손녀였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세월이 흘러 단종 3년(1455년) 6월 6일, 경정공주는 67세의 나이로 삶을 마치게 되는데 이때 단종은 쌀, 콩 5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조했습니다. 경정공주의 자녀들은 공주 사후 그녀의 재산이었던 노비와 전답의 분배 문제를 두고 다투는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특히 장남 조무영과 4녀와 결혼한 김중렴의 갈등이 심각했는데 서로 고소해 국문이 일어나고 나란히 의금부에 갇힐 정도로 막장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경정공주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안골마을에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사각 묘로 되어있습니다. 봉분 좌우에는 큰 규모의 문인석 2기가 세워져 있는데 투박하고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작권 보호를 받는 본 콘텐츠는 유튜브 채널 역사패치의 이용허락을 받아 유텍스트 YouText가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