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어머니가 되려했던 '신덕왕후', 사후에도 태종에게 고난 겪은 사연은?
신덕왕후(1356년~1396년) 강씨는 조선의 제1대 왕 태조의 왕비로 태조 이성계의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조선 건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여인이었습니다.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황해도 곡산에서 고려 충혜왕 때 세도를 떨친 권문세가의 규수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조상은 강호경과 강충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쪽 선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강씨는 숙부 강윤충이 이성계의 큰아버지 이자흥의 사위였던 인연으로 이성계와 만날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경처가 됩니다. 참고로 고려 시대에도 원칙적으로는 왕을 제외하고는 정실부인을 한 명밖에 둘 수 없었지만, 고려 시대 말기의 혼란으로 인해 귀족들은 경처(개경)와 향처(고향)를 구분해 두 명의 정실부인을 둘 수 있었습니다.
지방 출신 인물들은 대개 현지에서 결혼을 했지만 이해관계에 의해서 개경의 중앙귀족과 다시 정략결혼을 하는 폐단이 등장하는 것인데, 이성계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성계는 타고난 무예와 지도력으로 커다란 군공을 쌓게 되고 권문세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크게 성장을 하게 되는데, 더 나아가 고려 귀족사회에 진입을 하기 위해 그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략적으로 결혼한 것과는 다르게 이성계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난 일화는 유명했는데, 아마도 둘 사이의 부부금슬이 워낙 좋다 보니 구전된 설화들과 이성계의 이야기가 결부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의 여자가 되었으나 지독한 대가를 치른 ‘원경왕후’ (1부) 집안의 몰락
원경왕후(1365년~1420년) 민씨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왕비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며느리이자, 세종대왕과 양녕대군의 어머니입니다.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4남 4녀 중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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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과 세종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던 ‘그녀’ (1부) 실록엔 없는 그녀의 출생
정선공주(1404년~1424년)는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의 딸로 1404년(태종 4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4남 4녀 가운데 4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출생 사실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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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든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 좀 떠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 난 뒤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줍니다. 이에 이성계는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는데 여인은 갈증으로 급히 달려온 모습을 봤을 때 냉수를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서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리했다고 수줍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가 그제서야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이성계는 한동안 넋을 잃었는데, 이 여인이 바로 후일 신덕왕후 강씨였습니다.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봤음에도 후궁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태종의 속사정
태종 11년(1411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원경왕후와 그녀의 집안은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조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것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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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 이름의 유래, 조선 태종이 사랑한 둘째 딸 ‘경정공주’ 이야기
경정공주(1389년~1455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9년(창왕 1년)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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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할 당시 신덕왕후는 이성계보다 21살 연하였으며, 이성계는 향처인 한씨(신의왕후)와의 사이에서 장성한 자녀들(6남 2녀)을 두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강씨는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보다 2살 어렸고, 이성계의 둘째 며느리인 김씨(정안왕후)보다 1살이 어렸습니다. 그녀가 이성계와 언제 혼인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 이방석의 생년이 1382년이고, 방석의 누나인 경순공주(생년 미상)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늦어도 23세 이전에 이성계와 혼인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의 큰누나, 태종의 첫째 딸! 정순공주 이야기
정순공주(1385년~1460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5년(우왕 11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종의 첫 자녀였던 그녀는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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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강씨는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과 딸(후일 경순공주)을 낳게 되었고 향처의 자녀들인 이방간(4남)과 이방원(5남)이 그녀가 있는 고려 개경으로 유학을 올 정도로 한씨의 자녀들과도 잘 지내게 됩니다. 이성계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기에 자신의 자식들과 개경으로 유학 온 이방간과 이방원의 교육을 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특히 이방원은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데 신덕왕후가 그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찌 내가 낳은 아들이 되지 않았는가?”라고 하며 아쉬움으로 탄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방원은 고려 우왕 때인 1383년 열일곱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급제하게 되는데 10대가 문과에 급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뿌리가 변방인 동북면 지역의 무인 집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문과에, 그것도 열일곱에 급제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방원의 뛰어난 역량이 과거시험 합격의 원동력이겠지만 고려시대 과거는 악명 높은 조선시대 과거보다 진입 장벽이 훨씬 높은 걸 감안하면 그의 합격에 신덕왕후의 배경과 뒷바라지의 힘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였는지, 이방원은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못지않게 신덕왕후를 잘 따르고 의지를 했습니다.
심지어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면 필히 그녀와 상의할 정도였으며 위화도 회군 당시 볼모로 잡으려는 군사들을 피해서 신덕왕후와 이복동생들을 목숨을 걸고 지킬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신덕왕후와 이방원은 뛰어난 판단력과 강력한 실행력이라는 비슷한 성향을 가지면서 모자처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조선 건국 이후 둘 사이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외모가 아름답고 유력 권문세족 가문의 딸이었던 신덕왕후 강씨를 매우 아꼈다고 합니다. 강씨는 친정 집안의 탄탄한 인맥을 배경으로 이성계가 고려 귀족사회로 진입하는 통로를 마련했고, 자신의 첫째 아들 방번을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만들 정도로 그녀의 로비 능력은 탁월했다고 합니다. 1392년 음력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정몽주가 이성계와 그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을 때 강씨는 생모인 한씨 사후, 무덤에서 여묘살이를 하든 이방원을 급히 해주로 보내 아픈 이성계를 개경으로 오게 하면서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또한 그해 음력 4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하자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그녀였습니다. 이는 강씨의 수완과 결단력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담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조선이 건국되면서 강씨는 1392년(태조 1년) 8월 25일 조선의 첫 왕비가 되면서 현비에 봉해집니다. 이때 이성계의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개국 전에 사망했기에 큰 논란 없이 그녀는 왕비에 오르게 됩니다. 왕비가 된 신덕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지극한 총애를 바탕으로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는 야심을 보이게 됩니다.
이후 이해관계가 맞은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하게 되면서 결국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 5명(1명은 조선 개국 전 사망)을 제치고 그녀의 차남인 방석을 왕세자로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장남도 아니고, 조선 개국에 아무런 공이 없는 어린 방석(11살)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아들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이방원은 믿었던 계모의 변심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신덕왕후는 1396년(태조 5년) 9월 15일, 41살의 나이에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직접 관리들을 데리고 다니며 능지를 물색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397년(태조 6년) 1월 ‘언덕과 산이 감싸서 풍수가 길하게 호응하는’ 길지라는 취현방(현재의 정동) 북쪽 언덕에 신덕왕후의 정릉을 조성했는데 이곳은 경복궁과 멀지 않은 도성 한복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했으며 1년간의 공사를 거쳐 정릉의 동쪽에 그녀의 명복을 기원할 원찰인 흥천사를 짓습니다. 태조는 능과 절을 다 돌아본 뒤 신덕왕후와의 자식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그녀의 능에 재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나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왕비의 장례를 치르면서 신하인 권근에게 부인에 대한 감정을 풀어놓았습니다. 자신이 고려 말 관직에 있을 때부터 조선 건국의 과업을 이루기까지 신덕왕후의 내조가 많았고, 왕이 되어서 국정운영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충고하고 도와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죽음을 어진 재상을 잃은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하지만 신덕왕후 자신도 예상 못 했을 본인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서 조선 왕실은 폭풍전야와 같은 상황이 됩니다. 왕비의 아들이라는 명분으로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지만, 신덕왕후가 죽어 국모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세자의 보호막은 한없이 약해집니다. 태조 이성계는 세자를 지키기 위해 신덕왕후의 능을 경복궁 지근거리에 조성해 그녀의 권위와 존재감을 유지하려 했지만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1398년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아들들에 의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정도전은 물론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세자 방석, 방번 형제는 모두 제거됩니다. 그리고 사위 이제 또한 살해당해, 그녀의 딸이었던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는 비참함을 겪게 됩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의 분노는 그녀의 자식들을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얼금고령(서자 출신에 대한 관직을 제한)을 내려 적서 차별 제도로 이어지게 합니다. 한편 신덕왕후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이방석의 죽음에 반기를 든 세력도 있었습니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친족으로서 ‘신덕왕후 강씨의 원수를 갚고자’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조사의의 난(1402, 태종 2년)이었습니다.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관직을 잃고 연금 상태에 처했지만,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뜻을 존중하여 동북면(함경도) 지역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후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신덕왕후의 조카 강현과 함께 동북면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태상왕 태조 이성계의 위세(태조 이성계의 배후 가능성)를 등에 업게 됩니다. 이 난은 1402년(태종 2년) 11월 5일에 동북면 안변에서 발생하여 이후 강원도 북단과 서해도까지 확산되다가 27일 정부군에 의해 서북면 안주에서 평정이 됩니다. 조사의의 난은, 관련된 이들의 처벌이 태종대 내내 지속되었을 정도로 여파가 심각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왕이 된 이후에도 신덕왕후에 대한 분풀이를 계속했습니다. 그녀의 무덤인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여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1408년 음력 5월 24일) 이방원은 종묘에 이성계와 친어머니의 신주만 모셨고 신덕왕후는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면서 배제를 시킵니다. 또한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정릉(신덕왕후 능)을 파괴하고 이전하라 명합니다. 1409년(태종 9년) 2월, 정릉은 서울 중구 정동에서 도성 밖 양주,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현 정릉동)로 옮겨졌으며, 아버지 이성계가 정성 들여 조성한 무덤의 병풍석과 난간석 등을 옮기지 못하게 하고 새 정릉으로는 장명등(돌등)과 혼유석(상석) 등 최소한만 옮기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태조 시절 조선 최초의 왕릉이자 가장 아름답게 꾸며졌던 정릉은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는, 조선 왕릉 중 가장 초라한 무덤이 됩니다. 또한 두 달 뒤인 1409년 4월, 기존 정동에 있던 정릉의 정자각을 헐면서 그 자재들을 중국 사신 접대를 하기 위한 시설인 태평관 건축에 사용하게 되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하게 됩니다. 이후 1410년 8월,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이방원은 정릉의 병풍석을 복구에 사용하라 명합니다. 광통교는 한양의 제1대로에 놓인 다리로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는데 이곳에 의도적으로 신덕왕후의 무덤돌로 다리를 다시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묘소가 훼손되고 철거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신덕왕후 무덤의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이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의 복수는 끝이 없었습니다. 신덕왕후를 폐비 수준으로 끌어내렸고, 1412년에는 그녀의 기제사를 서모와 형수, 제수 격으로 낮춥니다. 1416년엔 신하들에게 신덕왕후가 자신의 계모가 아니라고 선언했으며, 1418년 상왕 시절엔 그녀의 제사를 왕실이 아니라 곡산 강씨 집안에서 치르도록 하면서 아예 왕실에서 내쫓았습니다.
심지어 태종 이방원 사후인 1426년, 아들 세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신덕왕후의 영정을 고려 왕과 왕비의 초상과 함께 태워버립니다. 이렇게 그녀의 무덤인 정릉은 사실상 평민의 무덤으로 전락해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172년이 지난 1581년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이 선조의 가마 앞에서 “자신은 국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에서 면제해 달라.”라고 격쟁했습니다. 당시 함흥에 있는 조선의 추존 4대조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을 국묘봉사자라 하면서 군역을 면제했었기에 강순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덕왕후의 예우를 왕비격으로 복권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선조도 신의왕후의 후손이었기에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백 년 가까이 신하들이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왕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669년 송시열이 신덕왕후의 복권을 상소하였고 현종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정릉의 수난은 끝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석물의 복원 정도만 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신하들이 연일 요청을 하자 종묘 배향까지 허락하면서 신덕왕후의 무덤은 다시 왕릉이 되고 위패가 종묘에 모셔지게 됩니다. 이후 정릉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의 ‘세원지우’라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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