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여자가 되었지만 집안의 몰락을 당한 ‘원경왕후’의 사연
원경왕후(1365년~1420년) 민씨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왕비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며느리이자, 세종대왕과 양녕대군의 어머니입니다.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4남 4녀 중 셋째 딸로 개경 철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본관이 여흥(경기도 여주)이었습니다. 원경왕후의 집안은 고려 후기에 급부상한 권문세족 중에서도 손꼽히던 가문으로 재상지종으로 분류된 15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고려의 경우 여성의 상속권도 인정했기 때문에 왕이 되는 데엔 어머니의 신분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왕족들 사이에선 종친 간의 혼인(족내혼)이 흔했는데,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충선왕은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15개 가문을 선정하게 됩니다. 이 가문들은 ‘누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재상지종이라 부르며 왕실과 결혼을 할 수 있었는데, 이중 원경왕후의 가문인 여흥 민씨가 포함이 될 정도로 그녀의 가문은 당시 고려를 주름잡던 명문가였습니다.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봤음에도 후궁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태종의 속사정
태종 11년(1411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원경왕후와 그녀의 집안은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조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것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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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종의 큰누나, 태종의 첫째 딸! 정순공주 이야기
정순공주(1385년~1460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5년(우왕 11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종의 첫 자녀였던 그녀는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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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년(우왕 8년), 당시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는 성균관 사성(부총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해에 이방원은 16세의 나이에 성균관에 입학해 민제와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게 되는데, 훗날 왕이 되어서도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사부’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이방원은 한눈에 보아도 매우 총명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고 비록 권문세족이 아닌 변방의 가문이었지만, 고려 말을 대표하는 신흥 무장인 이성계가 아버지였기에 사돈을 맺기에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제는 혼기를 놓치고 있는 셋째 딸의 사윗감으로 방원을 낙점했습니다.
‘소공동’ 이름의 유래, 조선 태종이 사랑한 둘째 딸 ‘경정공주’ 이야기
경정공주(1389년~1455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9년(창왕 1년)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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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직지’를 찾다
한국이 세계 최초로 개발해 낸 것은 꽤나 많습니다. MP3라든지, 쿠션 팩트라든지, 반도체, 선박 등등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제품이 한국인의 손과 머리에서 태어났죠. 머리가 유별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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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규수였던 원경왕후는 인물이 좋고 똑똑했으며 눈이 굉장히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당시에는 노처녀라고 불릴 수 있는 나이인 18세까지 결혼을 거부했는데, 이방원을 보고 난 뒤 마음에 들었는지 혼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1382년, 18세의 원경왕후는 아버지 민제의 제자이자 2살 아래의 이방원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방원은 당시 고려의 풍습대로 민씨의 집안에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결혼을 올린 다음 해에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 급제를 하면서 자신의 진면모를 보여주게 됩니다.
현대 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 세계를 놀라게 한 경주의 3cm짜리 유물
안녕하세요, 재미주의입니다. 2016년 11월 경주 동궁과 월지 ‘나’ 지구에서 금박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선각단화쌍조문금박, ‘건물지’와 ‘회랑지’ 주변 유물 포함 층에서 각각 한 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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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이방원은 신혼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장인인 민제는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사위를 수시로 ‘선달’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선달은 문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주로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가지 못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로 그 범위가 좁혀집니다. 원경왕후의 집안은 고려 중기부터 대대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으며 민씨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답고, 인자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민제도 한 번만 읽어도 바로 기억할 정도로 명석했다고 전해지기에 그녀 역시 가풍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또한 이방원이 변방 무인 가문인 출신적인 한계를 뚫고 권문세족들 틈에서 17살에 과거를 급제할 정도로 뛰어났기에 태종과 원경왕후의 자식들이 천재 소리를 들은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의 집안 내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원경왕후는 결혼 후 10년 동안 위화도 회군, 정몽주의 피살, 고려의 멸망 등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지켜보게 봐서 그런지 조선 개국 전에 낳은 3남 2녀 중 아들들 셋이 전부 일찍 죽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기까지 남편 이방원이 큰 공을 세우게 되지만, 그만큼 많은 위험에 노출이 되었기 때문에 대담하다고 알려진 원경왕후 일지라도 심리적으로 불안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아이에 문제가 생겼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392년에 시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남편 이방원이 왕자인 정안군에 책봉되자, 그녀는 정녕옹주에 봉해집니다. 왕의 딸도 아닌데 옹주로 봉해진 것은 아직 조선이 내명부와 외명부의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당시는 왕의 후궁과 종친 그리고 신하의 아내들까지 싹 다 옹주 작위를 주었는데, 훗날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해진 후에는 대군의 부인은 부부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 중 가장 공이 많은 이방원이 아닌 불과 11세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이방원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 그의 과격한 모습에 태조가 반감을 가진 것이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왕비가 된 신덕왕후가 태조 이성계의 지극한 총애를 바탕으로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는 야심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권이 강한 나라를 꿈꾼 정도전 세력이 그를 밀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참고로 장성한 이방원을 포함한 6남 2녀는 조선 개국 전에 병으로 죽은 신의왕후(향처) 소생이었고 어린 방석과 방번, 그리고 경순공주가 신덕왕후(경처)의 소생이었습니다. 장남도 아니고, 조선 개국에 아무런 공이 없는 어린 방석(11살)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아들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이방원은 믿었던 계모의 변심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왕자들과 종친들을 권력 일선에서 배제하는 시도가 계속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덕왕후가 1396년(태조 5년) 9월 15일, 41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조선 왕실은 폭풍전야와 같은 상황이 됩니다. 갈등은 1398년(태조 7년) 최고조에 달합니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정도전이 왕자들과 종친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모든 사병과 무기를 국가에 회수한다는 사병 혁파법을 강행하게 됩니다. 왕자들과 종친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결국에는 사병들과 무기들을 빼앗기게 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때 발 빠르게 움직인 원경왕후는 으슥한 곳에 무기를 숨겨놓아 후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개국공신 세력들과 왕자들 사이의 갈등이 이처럼 고조되던 무렵,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 드러눕게 됩니다. 절박한 상황에 몰렸던 왕자들에게 태조의 병환은 기회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실록이나 <연려실기술> 등 조선 시기의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철저히 이방원의 입장에서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들이 먼저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라고 전합니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문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원경왕후는 정도전 세력이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게 되었고,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당시 임신 중)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 이방원을 불러냈습니다. 이방원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원경왕후와 대책을 논의했으며 큰처남 민무구를 이숙번에게 보내 군사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얼마 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책사 하륜의 조언대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다면 안산군수 이숙번을 투입할 작정이었는데, 마침 이숙번이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에 관련된 일로 인해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초경(오후 7~9시)이 지나자 궁에서 급히 사람이 나와 태조가 위중하다며 왕자들에게 입궐을 명했습니다. 이방원은 궁궐 입구에 등불을 밝히지 않은 게 의심스러워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서문 밖으로 말을 타고 나왔으며, 원경왕후는 남편이 도착하자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내주면서 반정을 독려했습니다.
이후 이방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합류한 이숙번, 하륜, 조영무, 그리고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 등과 군사를 일으켜 신덕왕후의 아들들인 세자 방석, 방번과 신덕왕후의 사위 이제 그리고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니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당시의 기록이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왕자의 난에 원경왕후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난을 일으킨 것을 정당화시키고 책임을 무마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장자 승계의 법칙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살아있는 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둘째 형 이방과를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조선 제2대 왕 정종(재위 1398년~1400년)이었습니다. 이후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장악했던 중앙군의 병사들을 회수하면서 형제들과 부마와 함께 병권을 나누게 됩니다.
이때 이방원은 강원도와 동북면을, 이방의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이방간은 황해도와 서북면의 병권을 각각 관장하게 되었고, 경상도와 전라도는 태조의 장녀 경신공주 남편이자 부마인 이애가 맡게 됩니다. 그러나 이방원의 바로 윗형인 넷째 이방간이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히 여기고 자신도 권좌를 차지할 욕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박포가 이방간을 더욱 부추김으로서 1400년 음력 2월에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입니다.
또다시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친형제들끼리 골육상쟁을 벌일 순 없다며 이방원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원경왕후는 당찬 여걸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정종실록>에는 이런 민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자 그녀는 정빈이 되었고, 그해 음력 11월에 이방원이 정종에게 양위를 받아 보위에 오르자, 그녀도 정비의 칭호를 얻어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왕비가 되자마자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원경왕후는 자신이 태종 이방원과 같이 공동으로 집권했다고 생각했지만, 태종은 이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또한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이 정계와 군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자 이제(양녕대군)와 친밀하자 태종은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처남들이 정사를 농단할 거라 여겨 이를 몹시 경계했습니다. 이는 양녕대군이 세상을 떠난 세 명의 형들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자라게 하면서 자연스레 외숙부들과 친했고 잘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외척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수많은 후궁들을 들였는데, 이로 인해 원경왕후는 남편에게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날이 갈수록 태종과 원경왕후와 언쟁이 심해지자 한동안 태종이 그녀가 있는 교태전에 가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지게 됩니다. 왕이 여색을 탐하는 것 자체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왕실의 안녕을 위해 여러 명의 후궁을 들이는 게 용납이 되던 시기였기에 일반적인 내명부의 왕비라면 그냥 참고 인내했겠지만, 원경왕후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에서도 기가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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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가 되었으나 지독한 대가를 치른 ‘원경왕후’ (2부) 남편의 여성 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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