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큰누나, 태종 이방원의 첫째 딸 정순공주 이야기
정순공주(1385년~1460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5년(우왕 11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태종의 첫 자녀였던 그녀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399년(정종 1년) 이거이의 아들이자 사헌부감찰인 이백강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이후 남편 이백강은 1400년(정종 2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아버지 이거이와 함께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우장군을 거쳐 대장군에 오르게 됩니다. 그해 11월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정순공주에, 이백강은 숭정대부 청평군에 봉해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부부가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욕 없는 판다? 코뿔소 뿔 밀렵? 젖먹이 호랑이? 동물원이 내린 기막힌 조치?!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맛 좋은 정보들을 알려드리는 기호식품입니다. 동물원에는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동물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해
youtext.ai
‘소공동’ 이름의 유래, 조선 태종이 사랑한 둘째 딸 ‘경정공주’ 이야기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경정공주(1389년~1455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딸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89년(창왕 1년)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4남 4녀 가운데
youtext.ai
태종 4년(1404년), 이거이가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탄핵되었고 그의 아들들인 이애와 이백강도 이에 연좌되어 죄인이 되는데, 이 일은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들을 제거하려는 신호탄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혼례를 올린 지 5년 만에 시아버지와 남편이 죄인이 되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모습을 지켜본 정순공주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유명 철학자 칸트가 청혼받자마자 도서관에 처박혀 7년 동안 책만 읽은 이유는?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마누엘 칸트는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여인이 칸트에게 청혼했다. 칸트는
youtext.ai
6개월마다 차를 바꾼 천재의 광기… 스티브 잡스여서 가능했던 이유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죽을 때까지 번호판이 없는 은색 벤츠 SL 55 AMG만 타고 다녔다. 스티브가 자신의 차에 번호판을 달지 않은 이유는 번호판을
youtext.ai
부마 이백강의 아버지 이거이는 고려 말인 1384년 이성계의 추천으로 천거되어 강계관군만호에 오른 인물로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오른 공신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조 5년(1396년) 3월 19일, 이거이의 장남인 이애가 태조의 장녀인 경신공주와 혼인을 하면서 왕실과 사돈을 맺게 됩니다.
태조 7년(1398년) 평안도 병마절제사로 왜구를 격퇴할 정도로 무인으로서 여전한 역량을 발휘했던 이거이는 아들들과 함께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부정하는 일본 당대표의 저질스러운 만행
이전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인물, 역사, 문화 등을 다루는 제 채널의 특성상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급적이면 감정이 아
youtext.ai
이렇게 태종의 공신들 중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거이는 장남 이애가 상당후에 봉해지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병권을 맡을 정도로 그의 집안은 군사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넷째 이백강이 부마로 결정되어 태종의 적장녀인 정순공주와 혼례를 올려 왕실의 겹사돈이 되면서 그의 가문은 조선 왕실과 더욱 밀접해집니다.
물론 정종 재위 시절 사병혁파 조치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가진 것이 원인이 되어 한때 좌천되기도 했지만 태종 2년(1402년)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오르며 신하로서도 정점을 찍게 됩니다.
참고로 부마 이백강의 형 이애는 태조의 장녀인 경신공주의 남편이었기에 경신공주와 정순공주는 고모와 조카이자, 동서 간이 됩니다.
이렇게 공신이자 왕실의 사돈으로 조선 초기 내로라할 명문가로 성장하던 이거이의 청주 이 씨는 태종이 외척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커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의 집안은 풍전등화에 놓이게 됩니다.
이거이의 역모 사건은 1401년에 이거이가 조영무에게 “태종 이방원의 어린 아들들이 장성하면 권력에서 밀려날 것 같으니 모두 죽이고 그 대신에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정종을 복위시켜 왕으로 다시 모시자”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은 은밀히 이거이와 조영무를 불러 그러한 일이 있느냐고 묻게 됩니다. 이거이는 눈물을 흘리며 “두 아들이 부마이고 저도 과분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딴생각을 품었겠습니까?”라며 억울해합니다.
하지만 조영무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진술하자 이거이는 펄쩍 뛰면서 “조 대감,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를 해치려 드오?"라고 항변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다행히 태종은 이거이가 공신이라는 점과 이백강이 정순공주의 남편이라는 점을 들어 극형에 처하지 않기로 하면서 결국 이 사건은 이거이 및 이애, 이백강 형제들이 서인으로 신분이 떨어지고 유배를 가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됩니다.
이때 대간들은 정순공주와 부마 이백강을 이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순공주를 부마 이백강의 유배지인 동성으로 함께 갈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태종 5년(1405년), 부마를 서인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이백강은 직첩을 돌려받아 신분을 회복하게 됩니다.
사실 이 사건은 1401년(태종 1년) 이거이가 조영무에게 말한 역모성 발언을 조영무가 곧바로 태종에게 은밀히 알린 것이었고, 태종은 이 사실을 몇 년 동안 모른척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종친들과 공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이 일을 공론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거이 역모 사건은 조영무의 발언 이외는 실체적 진실이 없었으며 태종의 성격상 이러한 큰 사건을 곧바로 처벌하지 않고 오랫동안 모른척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역모 사건치고는 처벌이 약했던 것을 보면 외척들을 견제하기 위해 태종과 조영무가 꾸며낸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이후 정순공주는 큰 부침이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으며 부마 이백강과의 사이에서 1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녀는 이색의 손자인 이계린한테 시집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12살 차이 나는 동생이었던 세종의 즉위년(1418년)에 정순공주의 남편 이백강이 청평부원군에 봉해지는데 이는 부마가 부원군에 봉해진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실록에서는 정순공주의 남편 이백강을 부마 중에서 가장 청렴하고 결백하며 온화하면서 근면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신으로 두 번이나 명나라에 갔었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인 물건을 가지고 가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조그마한 이익 때문에 자신에 누가 되게 하려 하지 아니함이었으며 남이 주는 것도 받지 않고, 사사로이 남에게 구하는 것도 없었다.”
1450년(세종 32년), 유록대부(정1품) 청평위에 오른 이백강은 작은 정자를 지어 주위에 화초를 심고 주변을 걸어 다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을 하루의 일과로 삼았을 정도로 소박한 성품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부마 이백강과 관련된 실록의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의외로 여자 문제로 늘 말썽이었던 양녕대군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 대군이 매형인 부마 청평군 이백강의 집에서 연회하였다. 이백강이 돌아가신 아버지인 이거이의 상을 끝냈으므로, 대군들이 연회를 마련하여 위로한 것이었다. 태종이 명하여 세자(양녕대군) 또한 갔는데, 밤이 깊도록 세자가 기생 초궁장을 끼고 누나 정순공주의 대청으로 들어가서 즐기고 술을 마시다가...” <태종 14년 10월 26일>
기록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기생 초궁장을 처음 만난 자리가 바로 부마 이백강의 집이었습니다.
다음 해에 양녕대군은 초궁장과 사통해 큰 논란이 되는데, 이는 초궁장이 상왕이자 양녕대군에게 큰아버지였던 정종을 모시던 기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왕 정종이 태종을 위해 베푼 연회가 끝나자 세자(양녕대군)는 매형인 청평군 이백강이 일찍이 축첩한 기생 칠점생을 데리고 돌아오려 하였다. 하지만 충녕대군(후일 세종)이 만류하며, 친척 중에서 서로 이같이 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하였다. 세자가 마음으로 노하였으나 애써 그 말을 따랐는데...” <태종 16년 3월 20일>
당시 칠점생은 기생 출신이었지만 엄연히 매형인 이백강의 첩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왕 정종의 여인을 건드릴 정도로 막 나갔던 양녕대군은 그녀가 매형의 여인이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물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충녕대군의 반대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칠점생과의 사통이 이루어졌다면 이 또한 큰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정순공주의 남편 이백강에 대한 실록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찾다 보니 양녕대군이 여자문제를 일으켜 폐세자가 되는 과정 중에 부마 이백강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부마는 첩을 둘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록에서 이백강이 첩을 두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이는 아직 조선 초, 제도가 정비되기 전이었기에 축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정순공주는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 이렇게 5대에 걸쳐 왕들의 배려 속에 평탄한 삶을 살았는데 실록에도 그녀에 대한 대우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세조 4년, 세조가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어 정순공주가 지금 온양 온정에 목욕하러 가니, 그녀에게 관아의 쌀 10석과 황두 5석을 주고, 아울러 음식물을 대접하라 명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넉넉하고 후하게 대접하라고 관아에서 명을 받은 온양 군사 조매가 공주를 가볍게 소홀히 하고 박대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조는 노하였고 그를 의금부로 잡아들여 국문하라고 명합니다.
1451년(문종 1년) 정순공주의 남편 이백강이 7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1455년(세조 2년)에는 공주의 하나밖에 없는 딸의 남편이자, 사위인 한산군 이계린(당시 55세)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1460년(세조 6년) 왕실의 어른으로 왕들의 배려를 받으며 장수했던 정순공주는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조카 세조는 크게 슬퍼하며 쌀과 콩을 아울러 70석과 포 50 필, 종이 1백 권을 부의했습니다.
그녀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있으며 앞면과 옆면 중간 지점까지 둘레돌을 두른 형태입니다. 남편 이백강과 합장이 되었으며 봉분 앞에는 묘표, 상석, 문인석, 묘갈, 혼유석 등을 두었는데 이중 묘표는 고려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작권 보호를 받는 본 콘텐츠는 유튜브 채널 역사패치의 이용허락을 받아 유텍스트 YouText가 제작했습니다.